처음 이 작품을 봤을 때는 그냥 미래형 레이싱 자동차가 멋있어 보여서 틀어본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몇 편 지나기도 전에 단순히 빠른 차가 나오는 레이싱 애니가 아니라, 한 사람의 성장과 좌절, 라이벌과의 경쟁, 팀 동료들과의 관계가 차곡차곡 이어지는 긴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특히 이 시리즈는 한 편만 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 TV 애니메이션에서 시작해서 여러 OVA로 계속 이어지는 구조라서, 어떤 순서로 보느냐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래서 어느 시점부터는 새로운 사람에게 소개해 줄 때마다 “순서부터 제대로 알려줘야겠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세계관에서 시간 순서대로 스토리가 이어집니다. 주인공 카자미 하야토가 어린 나이에 사이버 포뮬러 레이서가 되어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 여러 해에 걸쳐 그려지고, 그 사이에 새로운 머신, 팀, 라이벌이 하나씩 등장합니다. 이 흐름을 제대로 느끼려면 방영·발매 순서대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조금 헷갈릴 수 있는 부분은 극장판이나 총집편 같은 작품들입니다. 제목만 보면 새로운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기존 TV판이나 OVA를 재편집해서 만든 요약본에 가깝습니다. 새로운 본편 스토리를 알아가고 싶다면 TV 애니메이션과 OVA 시리즈를 우선으로 보고, 요약본은 복습이나 정리를 하고 싶을 때 선택적으로 보는 편이 좋습니다.
사이버 포뮬러의 전체 흐름 이해하기
이 시리즈의 핵심은 다섯 작품입니다. 이 다섯 개가 실제로 스토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본편입니다.
전체적인 흐름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TV 애니메이션으로 모든 것이 시작되고
- 그 다음 해의 이야기가 OVA로 계속되며
- 매 시즌마다 하야토와 라이벌들이 조금씩 나이를 먹고, 레이싱 환경도 진화하고, 분위기도 점점 진지해집니다.
특히 후반으로 갈수록 단순한 스포츠물이 아니라, 인간관계와 심리 묘사에 비중이 늘어나면서 더 묵직한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밝고 가벼운 분위기로 시작하지만, 뒤로 갈수록 레이서들의 부담과 상처, 선택의 무게가 드러나기 때문에, 순서를 지켜 보는 것이 감정선 이해에 매우 중요합니다.
1.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TV 애니메이션)
이 작품이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입니다. 1991년에 방영된 TV 애니메이션으로, 총 37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사이버 포뮬러라는 미래형 레이싱 대회와 그 시스템이 소개되고, 하야토가 본격적으로 레이서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 단계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 하야토의 나이가 아직 어리고, 비행기나 자동차를 좋아하는 소년에서 프로 레이서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 머신의 기본적인 기능, 레이싱 규칙, 주요 팀과 스폰서, 서포트 팀 등이 이 작품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 후에 중요한 인물이 되는 라이벌들도 이때부터 차근차근 모습을 드러냅니다.
전체 시리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TV판을 반드시 먼저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후의 OVA들은 이 TV판을 전제로 하고 있어서, 바로 넘어가면 인물 관계나 과거 사건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2.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11 (더블원, OVA)
사이버 포뮬러 11은 TV판의 다음 해를 그린 OVA 시리즈로, 1992년부터 1993년 사이에 발매되었고 총 6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형식은 OVA지만 TV판의 정식 후속 이야기입니다.
이 시점에서 가장 크게 달라지는 점은, 하야토가 “천재 소년 레이서”라는 이미지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하는 시기에 놓였다는 점입니다. 실력은 있지만, 주변의 기대와 압박, 자신에 대한 불안 때문에 흔들리기도 하고, 그런 틈을 타 라이벌들이 더 거칠게 치고 올라옵니다.
특히 블리드 카가라는 라이벌이 본격적으로 전면에 등장합니다. 단순히 실력만 뛰어난 경쟁자를 넘어, 하야토의 한계를 끌어올리는 존재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둘의 대결 구도는 이후 시리즈 전반에 걸쳐 이어지며, 마지막 SIN까지 이어지는 큰 줄기가 됩니다.
3.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ZERO (제로, OVA)
ZERO는 더블원의 다음 해 이야기를 다룬 OVA로, 1994년부터 1995년 사이에 발매되었고 총 8화입니다. 제목에서도 느껴지듯, 이 시리즈는 ‘제로의 영역’이라는 상징적인 개념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로의 영역’은 단순히 속도가 빨라지는 기술적인 한계를 넘어, 레이서가 육체와 정신적으로 극한에 몰렸을 때 도달하는 경지처럼 표현됩니다. 하야토는 그 영역을 경험하면서 심각한 후유증과 공포에 시달리게 되고, 레이서로서의 인생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ZERO에서는 다음과 같은 변화가 뚜렷합니다.
- 레이싱 장면의 연출이 더 속도감 있고 과격해집니다.
- 하야토의 내면 갈등이 깊어지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더 복잡해집니다.
- 팀과 머신의 방향성, 레이서로서의 삶에 대한 고민이 본격적으로 다뤄집니다.
이 시리즈를 지나면, 처음 TV판에서 보이던 밝고 직선적인 성장 스토리와는 다른, 한 번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4.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SAGA (사가, OVA)
SAGA는 ZERO의 다음 해를 그린 OVA로, 1996년부터 1997년까지 총 8화가 발매되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각 인물들이 자기만의 긴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는 새로운 캐릭터와 기술이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크게 변합니다. 신죠나 필 프리츠 같은 인물들이 두드러지게 활약하고, 팀 간의 정치적인 움직임, 기업의 이해관계, 기술 경쟁이 얽히면서 레이싱이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거대한 사업이자 전쟁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SAGA의 특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전체적으로 톤이 다소 어두워지고 진지합니다.
- 레이서 각각의 사정과 과거, 선택의 결과가 드러나면서, 누구도 완전히 편하거나 가볍지 않은 상황에 놓입니다.
- 머신의 성능과 기술 경쟁이 극한까지 치닫습니다.
이 단계에서 하야토와 주변 인물들은 단순한 ‘청춘 레이서’가 아니라, 삶과 직업, 신념을 걸고 달리는 성인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초반 작품들을 보고 이 작품까지 오면, 캐릭터들이 실제로 세월을 거치며 성장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됩니다.
5.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SIN (신, OVA)
SIN은 SAGA의 다음 해 이야기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발매된 OVA입니다. 총 5화로, 분량은 짧지만 내용은 매우 밀도가 높습니다. 팬들 사이에서는 사실상의 완결편으로 여겨집니다.
SIN의 중심에는 블리드 카가가 있습니다. 그동안 라이벌로만 보이던 인물이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고,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달려왔는지가 본격적으로 드러납니다. 하야토와의 마지막 승부는 단순한 레이스 그 이상으로, 서로의 인생을 걸고 부딪히는 결말에 가깝게 그려집니다.
SIN을 통해 앞선 모든 시리즈에서 쌓아 온 갈등과 인연이 하나의 큰 마무리를 향해 수렴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반드시 맨 마지막에 보는 편이 좋습니다. 중간에 먼저 보면, 인물의 변화와 감정선을 제대로 느끼기 어렵고, 여러 장면의 의미가 반감됩니다.
요약본·특전 위주의 작품들 살펴보기
본편을 모두 본 뒤에, 복습하거나 다른 각도에서 정리해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는 작품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이 작품들은 대부분 기존 내용을 재편집한 총집편이거나, 음성을 중심으로 한 드라마 형태입니다. 새로운 본편 스토리를 크게 추가하지는 않지만, 이미 본 내용을 다시 정리하거나, 사이사이의 빈 부분을 상상하게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그래피티
그래피티는 TV 애니메이션을 요약한 총집편 OVA입니다. 1992년에 발매되었으며, 긴 37화를 한 번에 되짚어 보고 싶을 때 보기 좋습니다. 처음 입문할 때 이 작품부터 보는 경우도 있지만, 캐릭터들의 감정 변화나 세세한 사건의 흐름이 생략되기 때문에, 가능하면 TV판을 먼저 보고 그래피티는 복습용으로 활용하는 쪽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11 총집편
이 작품은 더블원 OVA 6화를 요약한 총집편입니다. 1993년에 발매되었으며, 하야토와 블리드 카가의 본격적인 대립 구도를 빠르게 정리해 보고 싶을 때 적합합니다. 다만 세밀한 심리 묘사나 레이스의 전개가 간단하게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처음 볼 때는 원래 OVA 6화를 다 보는 편을 추천할 만합니다.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Memories
Memories는 조금 성격이 다른 작품입니다. 1994년에 발매되었고, 영상 작품이라기보다 드라마 CD와 일부 영상 특전이 섞인 형태로 존재합니다. TV판과 더블원 사이의 비하인드 스토리, 캐릭터들의 일상적인 모습 등을 들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본편의 큰 줄거리를 알아가는 데 필수는 아니지만, 좋아하는 캐릭터가 생겼을 때 그들의 다른 면을 알고 싶을 때 찾아보면 좋습니다. 특히 본편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사이에 어떤 대화와 감정이 오갔을지 상상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SAGA II
SAGA II는 이름처럼 SAGA OVA를 정리한 총집편 OVA입니다. 1997년에 발매되었으며, SAGA 전체를 하나의 흐름으로 다시 보고 싶을 때 유용합니다. 새로 추가된 본편 스토리는 거의 없고, 이미 본 내용을 효율적으로 되짚어 보는 용도에 가깝습니다.
정리해 보는 추천 시청 순서
전체 스토리를 빠짐없이 따라가고, 캐릭터들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느끼고 싶다면 다음 순서대로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합니다.
-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TV 애니메이션)
-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11 (OVA)
-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ZERO (OVA)
-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SAGA (OVA)
-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SIN (OVA)
이 다섯 작품이 기본 뼈대입니다. 이 순서대로 보면, 하야토가 어린 레이서에서 시작해 여러 해를 거쳐 한 사람의 프로 레이서로 성장하는 전체 과정을 시간 흐름대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중간중간에 그래피티, 11 총집편, SAGA II 같은 총집편을 끼워 넣어 복습해도 괜찮지만, 처음부터 요약본만 보면 이 시리즈 특유의 길고 섬세한 성장과 갈등이 충분히 전달되기 어렵습니다.
사이버 포뮬러 시리즈는 한 번에 다 보기에는 분량이 적지 않지만, 한 편 한 편 시간이 흐를수록 같은 인물들을 조금씩 다른 마음으로 보게 되는 재미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누가 더 빠른지에만 눈길이 가다가, 나중에는 누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 선택이 다음 해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그런 흐름을 따라가고 싶다면, 천천히 위의 순서를 지켜가며 감상하는 편이 좋습니다.